판결문으로 보는 대한민국의 사건(미스터리 사건사고 게시판과 동시연재)

"우리의 사랑을, 우리가 불륜관계라는 것을 믿어달라" 내연남에게 장기를 기증하려던 내연녀 사건

세피로트의나무 2021. 4. 28. 08:26

0. ㅇㅅㅇ

 

그동안 다루는 사건마다 결론이 유죄가 나건 무죄가 나건, 거의 모든 사건이 사람이 죽는 사건을 다뤄와서 찜찜한 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사람을 살리는 사건입니다.

재판의 종류도 형사재판이 아닌 행정소송입니다.

 

 

1. 사건개요

여자 A와 남자 B2012년경부터 산악회에서 만나 불륜, 내연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던 중 B2017년경 한 대학병원에서 신장질환이 악화되어 신장이식이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상황에서 내연녀인 A는 내연남인 B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본인의 가족 혹은 배우자의 가족 이외의 타인에게 장기를 기증하려면 미리 국립장기이식기관인 질병관리본부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A2017. 6. 29경 자신의 신장을 B에게 이식해 주도록 허락해 달라고 신청을 했다. 그러나 2017. 9. 20경 질본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AB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아 장기매매로 의심된다는 이유였다.

 

내연녀 A는 이에 불복하여 법원에 자신의 장기이식을 가로막는 질본의 불허가를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2. 재판

 

0.) 잠시만요 잠깐만 보고 가실게요

 

현행법상 국가의 행정은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다만 그 근거법률에 그 행정이 다루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다 세세히 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법률보다 하위의 법규에 세부내용을 규율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에 관한 법률 시행령, ~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규칙, ~에 대한 고시 등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이 경우 이 법규가 행정부 공무원과 일반 국민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있고, 행정부의 내부 업무처리 매뉴얼에 불과할 뿐 일반 국민에게는 구속력이 인정되지는 않는 경우가 있다.

 

, 이 재판의 쟁점은 질병관리본부가 내연녀 A의 신청을 거절하면서 그 거절(불허가)의 근거로 제시한 규정이 일반 국민인 A에게도 구속력이 있는 규정인가, 아니면 행정부 내부의 업무처리 매뉴얼에 해당하는 규정인가의 여부이다.

 

 

1). 1(대전지방법원) - 원고(내연녀 A) 승소 판결

1심 재판부 대전지방법원은 재판 끝에 내연녀 A의 장기이식대상자신청을 거절한 질본의 결정이 위법하다고 보고 이를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 일단 장기이식법 제26조 제3항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제11조 제4항에 따른 16세 이상의 장기등기증자와 20세 미만인 사람 중 골수를 기증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장기등의 이식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다. 이 경우 본인 또는 배우자의 가족에게 골수를 기증하려는 경우 외에는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기준과 절차에 따라 미리 국립장기이식관리기관의 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여 위임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법'은 이 시행규칙의 상위법령인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이식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이에 관한 사항이 위임되어 있는 것은 정당한 위임에 따른 것이므로 여기에는 법적인 문제가 없다.

 

- 그러나, 질본이 원고의 신청을 거절하며 장기이식법 시행규칙과 함께 처분의 근거로 제시한 살아있는 자의 장기이식 업무안내(본인, 배우자의 가족이 아닌)타인 간 장기기증(타인지정)의 대상을 고교동창, 사실혼 부부 등과 같이 기증자와 이식대상자의 오랜 기간 친분관계가 있어 기증하는 경우로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이식대상자 선정 승인 절차에 관한 세부사항(2017. 11. 5. 질병관리본부고시 제2017-8) 4조 제1항 제2호의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이 오랜 기간 직접적인 친밀한 관계라는 기준은 법령에 근거도 없고 규정의 형식 등의 사항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일반 국민에게 구속력이 있는 규정이 아닌 행정부 내부의 업무처리 매뉴얼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고, 저 규정은 행정부가 아닌 법원이나 일반 국민을 구속할 수 없다. 즉 이 결정이 정당한지 아닌지 여부는 장기이식법과 그 시행규칙이 제시하는 기준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 질본이 제시한 거절의 근거는 일반 국민을 구속하는 장기이식에 관한 법률이나 그 시행규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근거이고, 이 거절함에 있어 원고 A와 내연남(이라고 원고가 주장하는) B의 관계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 장기매매 등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사유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는 위법하다.

 

라는 이유로 원고 A의 승소를 판결, 질병관리본부의 불허가를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이에 항소했다.

 

2). 2(대전고등법원) - 항소 기각

2심 재판부는 질병관리본부의 항소를 기각하며 원고 A의 승소를 다시 한 번 판결하였다.

기본적인 법리적 판단(질본이 근거로 제시한 업무안내 규정은 일반 국민인 A와 법원을 구속할 수 없음)1심과 같고, 재판부는

 

- 행정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에서 그 행정처분이 적법하다는 입증에 대한 책임은 적법성을 주장하는 행정청(피고) 쪽에 있다. 그런데 피고의 주장과 근거를 종합했을 때 원고 AB의 관계가 불명확하여 장기매매로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 B가 신장이식이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은 것은 2017년 경, AB가 서로 알게 된 것은 2012년 경, 서로 연락을 이어온 것은 2013. 12월 경부터 4년여 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 둘의 관계가 시작된 시기, 연락의 내용, 연락의 빈도 등을 볼 때 B2013년 경 신장질환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사정만으로 AB의 관계가 이후의 B의 신장이식을 위한 빌드업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 장기기증자와 장기이식대상자 간의 경제적 상황이 차이가 난다는 사정만으로 장기매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등을 추가로 설명하며 질병관리본부가 A의 신청을 거절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 이를 취소한다는 판결을 유지했다.

 

3.) 3(대법원) - 상고 기각

대법원에서도 판결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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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다뤄본 사건이 다 형사재판이었고, 그 중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을 제외하면 다 사람이 죽는 사건이었는데

 

처음으로 형사사건이 아닌 사건, 사람을 살리는 사건을 다뤄봅니다.